[종이책] 이 사람을 아시나요 - 다은 육명길 자서전 :희수(喜壽, 77세) 기념 '신앙고백' 자서전
이 사람을 아시나요
  • ISBN
    979-11-6493-034-0 (03810)
  • 저자
    지은이: 육명길
  • 제본형식
    종이책 - 무선제본
  • 형태 및 본문언어
    239 p. / 한국어
  • 가격정보
    15,000원
  • 발행(예정)일
    2020.02.28
  • 납본여부
    납본완료
  • 발행처
    오늘의문학사 - 홈페이지 바로가기
  • 키워드
    육명길 시인; 육명길 목사; 다은교회; 시집 사랑을 받은 자여; 자서전 이 사람을 아시나요; 월간 한울문학; 문학사랑; 복음신문; 가진아선교회; 갈증을 느끼는 자에게; 아! 진실한 사람아; 금 사과 같은 말; 가진아는 말한다; 보다 더 진실하고; 사랑의 꽃 향기; 마지막까지 진실하라; 돌아다니는 장미; 120세 인생아; 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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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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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喜壽, 77세) 기념으로 발간하는 육명길 시인의 11권째 시집 『아! 대한민국』과 함께 자서전 『이 사람을 아시나요』가 오늘의문학사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시인 육명길 원로 목사의 어린시절,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군 헌병대 근무 시절 등이 사실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전도인에서 전도사로, 전도사에서 목사로, 다시 저명한 부흥강사로, 직분이 상승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 자신의 신앙관이 자연스럽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70세에 목회 현장에서 은퇴한 후, 다시 ‘다은교회’를 개척하였고, 77세를 맞은 현재에는 ‘가진아선교회’를 결성하여 어려운 목회자들을 돕고 있습니다.시집을 발간하여 판매되는 금액, 자서전을 발간하여 판매되는 금액, 그리고 부흥회 강사와 간증 등으로 들어오는 수당 등을 모두 모아 가진아선교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육명길 원로 목사의 전화는 010-2961-0012번입니다. 선교의 깃발을 들은 시인 육명길 원로목사의 활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더라, 평가를 받고 발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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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서문 / 4|리헌석 : 말씀을 증거하는 목자의 신실한 자세|제1부 | 곤고하던 성장기진골 출신 / 15목근화(木根花) / 183살까지 / 21초등학교 시절 / 25울 엄마 / 31공주에서 살다 / 33고등학교로 / 45우선은 교회 / 48울고, 울고 또 울다 가신다. / 55제2부 | 동분서주 방랑기재건 운동 / 65소망의 바다로 / 67가자 서울로 / 77농부로 살자 / 84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 / 86결혼 / 106제3부 | 목회의 가시밭길교회 생활 / 121첫 목회지 / 130도산 목장아 / 141개척교회 / 154죽으면 죽으리라 / 158부흥사를 향하여 / 166사랑 찾아 반백년 / 177제4부 | 하나님의 일꾼으로영원하리, 내 사랑아! / 189다은동산 / 195민족 성전을 건축하자 / 208축복을 받는 자여 / 216은퇴? 끝이 아니다 / 224추의(芻議) / 234영원히 빛나리! / 237에필로그(Epilogue) / 238
판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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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아시나요육명길 시인 희수(喜壽, 77세) 기념 자서전발 행 일 ┃ 2020년 2월 28 일지 은 이 ┃ 육명길발 행 인 ┃ 李憲錫발 행 처 ┃ 오늘의문학사출판등록 ┃ 제55호(1993년 6월 23일)주 소 ┃ 대전광역시 동구 대전로867번길 52(한밭오피스텔 401호)전화번호 ┃ (042)624–2980 팩시밀리 ┃ (042)628–2983전자우편 ┃ hs2980@hanmail.net카 페 ┃ cafe.daum.net/gljang(문학사랑 글짱들) ┃ cafe.daum.net/art–i–ma(아트매거진)공 급 처 ┃ 한국출판협동조합 주문전화 ┃ (02)716–5616팩시밀리 ┃ (02)716-2999ISBN 000-값 15,000원ⓒ육명길.2020* 이 책은 eBook(전자책)으로 제작하여 교보문고에서 판매합니다.* 잘못 제작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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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명 길•1944년 충남 공주 출생•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일본관서 신학 수료•안양기독교연합회 회장 역임•경기도 도정 자문위원 역임•통일원 교육 전문위원•다은교회 원로목사•감리교 호남선교 연회 부흥단장 역임•월간 한올문학 시 등단•한국크리스천 문학상 「시」•한국기독교시인협회 이사•대전문인협회 회원•사비문학회원 「부여」•복음신문 논설위원•월간 한올문학작가협회 회장•아멘 시 문학 총무이사•문학사랑 운영이사•한올문학 대상•한올문학 총무이사•감리교 호남선교연회•감리사협의회 회장 역임•저서·시집『갈증을 느끼는 자에게』 『아! 진실한 사람아』『금 사과 같은 말』 『가진(佳眞)아는 말한다』『보다 더 진실하고』 『사랑의 꽃 향기』『마지막까지 진실하라』 『돌아다니는 장미』『120세 인생아』 『사랑을 받은 자여』『아! 대한민국』•저서·자서전『이 사람을 아시나요?』
요약.본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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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골 출신“원수 같은 놈아, 나가 죽어라!” 시베리아 벌판에서 불어 닥치는 겨울바람 같이 차가운 엄마의 고함소리 때문에 몇 번이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성골 출신은 아니라도 진골 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자존심 때문에 벌떡 일어섰다. 보다 더 큰 은혜를 시시때때로 부어 주시는 분이 늘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골이란 신라 골품의 하나로서 부모가 다 왕계인 사람으로 박혁거세 왕부터 28대 진덕 여왕까지가 이에 속한다. 진골이란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왕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태조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다.우리나라 성씨는 대개 중국의 성씨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중국의 성씨는 어떤 경로로 발전하였을까? 중국 성씨는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으로 문자가 시작된 요순임금 때 제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처음에는 제왕가에서만 사용하던 성씨가 공로가 큰 신하에게 사성(賜姓)이 되면서부터 많은 성이 나오게 되었다. ‘성’을 가진 귀족, ‘성’을 가진 벼슬아치, ‘성’을 가진 양반층들이 차츰차츰 확대된 것이다.이러한 대륙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고조선시대에 ‘성’씨를 사용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귀족이나 민간까지는 퍼지지 못했다. 제왕에 한해서만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 삼국시대(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사성(賜姓)이 시작되었는데, 사성이란 나라에서 성을 내려주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공을 세운 재사, 무골, 묵거 등 3인에게 각각 ‘극’씨, ‘중실’씨, ‘소실’씨의 성을 내려주므로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신라의 박혁거세는 나무껍질 ‘박(朴)’씨로 박혁거세를 도와서 나라를 세운 6마을 촌장에게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培), 설(薛) 씨로 성을 내렸다.백제 시조 온조는 독자적으로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부여(夫餘)씨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 성씨는 고려에 와서 민간인까지 퍼지게 된다. 그러나 삼국시대처럼 하층민들은 일체의 성을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민간인까지 퍼진 고려에서도 그러하였다.빛나는 성씨를 가진 이들은 다른 성과 혼돈을 막기 위하여 만대에 자랑하기 위하여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공로를 세움으로 사성을 받고 빈약한 성씨이므로 성현이나 이름 있는 사람을 끌어들여 족보에 올리기도 한 것이다.중국성과 달리 우리나라 성씨의 중요한 것은 본(本)이다. 즉 본관이라고 한다. 조상을 하나로 하는 혈족을 말하는 것이다. 같은 성씨라도 족보의 특색이 있음이다. 즉 ‘오’씨는 해주 오씨, 고창 오씨, 동복 오씨 등 같은 시조를 내세우는 동성이면서 본관을 달리한다.동성동본은 본이 백대지친이라 하여 절대로 혼인을 금지하였다. 본관의 중요성이다. 동성동본의 금혼법이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려왔다. 성씨의 본관은 얼마나 되었을까. 고려 때는 나오지 않았고, 조선시대 이후로 등장했는데, 민간인이 성을 가지면서부터 성씨가 엄청 많아졌기 때문이다.‘중헌 문헌 보고’의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에 4,296개의 성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298 성씨만 남았다. 일제 찬탈로 성씨가 줄어든 것이다. 현재는 대략 250성씨로 본다.(한국성씨 보감, 인창서관 발행. 발행인 강선형, 1963년 12월 5일) 그리고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세계인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요즘은 새로운 성씨가 계속 등장하고 있는 추세다. 목근화(木根花)목근화(木根花)란 나무의 뿌리에 싹 나고, 잎 피고, 꽃 피고, 열매도 맺는다는 의미다. 나의 성(性)은 육(陸)이다. 시조는 육보(陸普), 육씨의 집성촌은 하나성 평반군 육향(육종)의 지명에서 시작되었다. 육씨의 연원은 옥천 육씨 대동보와 조선 씨족 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 육보는 중국 절강성 사람으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년)에 당나라 명종왕이 문학 전례지신으로 신라에 보냈다.홍은열, 정한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이기도 한 육보의 뛰어난 공적은 경순왕의 부마가 된 것이다. 그는 관성군(충북 옥천의 옛 지명)으로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옥천에 정착하여 살게 된다. 육보를 시조로 하고 옥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界)로 이어왔으나, 중만 계래 실전하여 고려 충렬왕 때 주부염과 인단(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세계를 계승하여 왔다.세조인 인단의 손자 거원은 고려 말 중량장을 역임한 자이다. 거원이 5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려(麗)는 덕곡공파, 둘째 항(抗)은 공주 목사공파, 셋째 수(綏)는 낭장공파로 크게 갈라진다. 막내 태귀(台貴)는 손자 대에 후손이 끊겼다. 덕공공파 려는 공양항래 도순찰사로 왜적을 격퇴시키는 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 되자 공주 더리에 은거를 한다. 손자 명산은 대장조 후래에 석동계, 석정계, 충의전으로 통하였다. 목사공파 항의 맏아들 진의 후예로는 부의를 지낸 저와 제주목사 한, 동래현감 세 명. 조선 정조대에 유학자 상지가 있었다. 둘째 아들 사후 손 동지에서 중추부사 춘수, 만호석, 선조계 참본 헌이 있었다.순창공파 후손 비의 아들 애는 참란, 지는 부사, 헌은 참봉이요, 남장공파는 조선 명종 때 한종 : 장사랑, 선조 때 붕 : 동정대부, 중종 때 홍은 학자로서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저서로는 ‘석정유고’를 남겼다. 근대에는 충북 옥천군 보은 영동지방, 대전, 금산, 전주, 장수, 김천, 선산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서울 4,140명, 부산 813명, 대구 985명, 인천 532명, 경기 1,370명, 강원 2,219명, 충남 3,168명, 경북 1,496명, 경남 723명, 전북 1,947명, 전남 256명, 제주 17명, 총 22,272명 경제 기획원 인구조사에 의해, 총 249개 성씨 중 85위이다.역대 주요인물은 ‘육인란 :고려 때 주부, 육려 :의자 일중 호는 덕곡 고려말 도순찰사, 육항 : 고려때 목사, 육진 : 조선 때 만호, 육재형 : 조선 때 동지 중추부사, 육병호 : 조선 때 고조참의, 육도 : 조선 때 통정대부’ 이다.근래 저명인사로는 육인수 : 종친회장, 전 국회의원, 육영수 영부인 오빠, 육종윤 : 농학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육진성 : 전 충북 교육감, 육장균 : 예비역 육군소장, 육종호 : 전 대통령 비서관, 육완순 : 이화여대 교수, 육종진 : 이리 시장, 육영수 :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명길 : 감리교 원로 목사 시인, 육종대 : 경기 여주 이포감리교회 목사, 육진경 : 진주 중앙감리교회(담임목사 한성수) 사모, 육은경 : 경찰관 부인, 육광경 : 회사원, 박근혜 : 육영수 영부인의 딸, 전 대한민국 대통령 등이 있다.나는 옥천 육씨 공주 목사 공파 23대, 나의 아들 육광경은 24대 손자, 육근하는 25대이며, 나의 항렬자는 종이요, 위 항렬은 균, 아래 항렬은 근이다.육보(시조) ⟶ 인단 ⟶ 희가 ⟶ 항 ⟶ 진 ⟶ 저 ⟶ 모가 공파 ⟶ … ⟶ 성실 ⟶ 명길 ⟶ 광경 ⟶ 근하!! 이 거룩한 계보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 찬송을 드린다.3살까지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를 드리고 돌아갔지만, 헤롯왕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2살까지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 명령하였기에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난을 가셨다.예수님처럼 나도 태어날 때부터 수난이었다. 잉태는 본가인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였지만, 외가는 전북 익산 망성리 였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출생지를 알았다. 어머니께서 산월에 친정으로 가셨다. 외할머니께서도 임신 중이셨다. 어머니께서는 큰 딸이었다. 15살에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는 것이다.그 당시 풍속은 같은 해에 같은 집에서 두 아이가 태어나면 기운이 쎈 아이 때문에 약한 아이는 허약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외가 집은 초가집이지만 안방, 웃방, 건너방도 있는 큰 집이었다. 앞마당이 대단히 넓었다. 뒷마당 끝에는 큰 대나무가 있었다. 앞뒤 좌우 마당가에는 대나무가 있었다. 집 주변은 밭으로 둘러 있었다. 외딴집이었다. 버스 타는 곳까지는 약 24km 걸어가야만 하였다. 그 중간지점에 있는 외가의 사랑방에서 나를 낳았다. 순산을 하였다고 한다. 몇 달 후 외할머니도 막내아들을 낳았다. 나하고 띠 동갑인 원숭이띠가 되었다.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향 경천에서 살지 아니하고 논산읍 대교를 건너 공주 방향으로 약 3km 가면 전통적인 농촌마을 가름내란 곳이 있다. 이곳에서 3살까지 살았다. 이곳에서 나는 ‘경끼’를 자주하였다고 한다. 이 병은 자다가 갑자기 깜짝깜짝 놀래 소리치며 울고 눈이 뒤집어지고 거품도 흘리며 오줌도 싸는 병이다. 캄캄한 밤이라도 아버지께서는 읍내 병원까지 나를 안고 달려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옥천 육씨 목사공파 후손은 공주에서 살았다.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7대까지 외아들이었다. 7대손의 묘지는 공주 무령왕릉 주변에 있다. 이곳은 무령왕릉이 발견되므로 관광지가 되었고, 황금 땅이 되었다. 조상들의 묘지 땅만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갑부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쉬움만 남는다.할아버지(육일선 陸日善)께서는 경천의 최고 갑부인 김해 김씨 할머니와 결혼하여 공주읍에서 경천으로 이사 오셔서 사셨다. 7대가 외아들로 내려왔지만 할아버지는 첫 번째는 딸, 두 번째는 큰 아들(윤실), 세 번째도 아들(창실), 막내아들(성실) 4남매를 키우셨다.할아버지께서는 부자이면서 대가족인 처가에 자존심이 발동하셨는지 돈을 벌겠다고 왜정시대에 일본으로 가셨다. 기다려도 돌아오시지 아니하시는 아버지를 모셔오겠다고 큰아버지가 일본으로 가셨지만, 함흥차사인지라,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모셔오겠다고 둘째아버지도 일본으로 가셨다.하지만 둘째아버지마저 돌아오시지 아니하므로 아버지께서도 일본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그 분들은 일본 교또에서 잘 살고 계셨다. 교또는 일본의 구 수도이다. 일본의 만행으로 우리나라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교또에서 살고 계신 할아버지, 큰아버지, 둘째아버지는 잘 살고 계신 것을 보고 아버지는 귀국하셨다.경천에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나 5식구가 가난하게 살고 있었기에 일본으로 가서 살기 위하여 귀국하신 것이다. 하지만 해방이 되므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88세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 사촌 형님께서 경천에 찾아 왔다가 상면치 못하고 떠난 후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가 없다.나의 고향인(본적지) 공주 경천은 공주군 계룡면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다. 일찍이 전기가 들어온 곳이다. 시골장으로는 제법 큰 장터이고 평상시도 사람이 끊어지지 아니하지만 장날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계룡산 상봉과 연천봉이 가깝고 옛날 전통적인 절 신원사 입구에 있다. 신원사까지는 약 4km이다.시장입구에서 떡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다. 이 할머니의 고향은 나의 외갓집 전북 인산이다. 이 할머니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신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먼 친척이기에 내가 가면 친 손자인 양 잘 해주셨다. 떡보인 나는 경천에 가면 이 할머니 댁에 꼭 가고 싶었다.아버지는 계룡 보통학교를 졸업하셨다. 친구들은 면서기나, 교사를 하였으나 아버지는 전기 회사에 다니셨다. 한 분뿐인 고모님은 이곳에서 결혼하여 아들만 4명이다. 막내 창수는 나와 나이가 같다. 몇 달 뒤에 출생하여 내 동생이 되었다.1944년생 막내 외삼촌 정인석, 막내 내사촌 박창수, 그리고 나 육명길(음력 2月 5일 생),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았다. 외삼촌은 세상을 떠났다. 창수는 지금도 경천에서 살고 있다. 고모네 형님, 형수님 다 세상을 떠났다.어릴 적 경천 고모님은 날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다. 추석이나 설이면 경천에 간다. 할머니는 경천에서 존경을 받는 어르신이다. 할머니와 동행하면 나까지도 대접받는다. 떡, 과자, 사탕, 용돈도 탄다.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한 고향이다. 자꾸만 가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경천만 생각하면 옛 추억이 영화 같이 돌아간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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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육명길 목사의 자서전 『이 사람을 아시나요』의 서문은 리헌석 문학평론가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자의 신실한 자세](육명길 시인의 자서전을 감상하며)가 ‘축하 서문’으로 책머리에 실려 있습니다. 그 부분을 발췌하여 서평으로 갈음합니다.시인 육명길 원로 목사는 <형언(形言)할 수 없이 신산(辛酸)한 생활 속에서도 신앙에 대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은 오롯한 자세에 옷깃을 여미었습니다./ 농경 사회이기에 논이 있고 밭이 있어야 했지만 타관객지에 겉보리 3말이 전 재산이었다.>고 그는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합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파 뒷동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다가 주인한테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고무신마저 찢어지게 되어, 어머니에게 꾸중 듣던 에피소드를 전합니다.>육명길 시인은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던 그의 꿈이 좌절되고,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공주영명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신앙에 집중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교회에서 맡기는 일이라면 거의 다 수용을 하였고, 지방회에서 하는 교사 강습회, 사경회, 연합부흥회, 수련회 등>은 <빠지지 않고 거의 참석하여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지난 세월을 회상합니다.><육명길 목사님은 처음에 충청권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서울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인연에 따라 경기도 지역의 교회에 시무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상황에 부닥칩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40일 작정 금식 기도를 하며, <일사각오(一死覺悟)>로 <내가 살아온다면, 내가 담임자로 목회를 할 것이고, 만약 죽는다면 전도사님이 담임을 하라>고 절박한 상황에서 산상기도에 나섭니다. 39일 기도를 하고 하산하여 다시금 목회자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섬깁니다.><은퇴한 후, 남은 생을 바쳐 봉사할 곳을 찾아 고심에 찬 궁리를 하며 기도하던 중, 갑자기 엄습하는 묵시(默示)와 사모(師母, 전도사)의 권유가 일치하여 전라남도 광양시에 새로운 둥지를 개척합니다./ 가진 고난을 극복하고 교회 설립을 이룹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가 설립한 ‘다은교회’를 ‘민족성전’으로 확장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기도하며 차츰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원로 목사로서, 아름답고 진실하자는 의미를 가진 ‘가진아선교회’를 결성하여, 말씀 증거의 길에서 고단해 하고 있는 목회자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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