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조선 선교에 바친 삶 - 복자 박상근 마티아가 만난 깔래 강 신부
조선 선교에 바친 삶
  • ISBN
    979-11-6015-049-0 (03230)
  • 저자
    모벡 공동체의 수녀 지음 이영길 옮김
  • 제본형식
    종이책 - 무선제본
  • 형태 및 본문언어
    271 p. / 140*205 / 한국어
  • 가격정보
    13,000원
  • 발행(예정)일
    2019.05.29
  • 납본여부
    납본완료
  • 발행처
    천주교안동교구
  • 키워드
    전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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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4한국어판 출판에 즈음하여 | 안-엠마누엘 드베셔 수녀·6역자의 말 | 이영길 신부·10서문 | 마리 어젠 들라마르 수사·16로렌 지방에서의 소년 시절·21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37조선을 향하여·61조선 교회를 섬기기 위해·77환난과 유배·105조선 - 되돌아갈 수 없는 땅, 프랑스로 귀환·161여러 가지 난관들, 본당 사목·193행복한 종착지, 트라피스트 수도원·221모벡의 씨토 수녀원 지도 신부, 아버지 집을 향하여·245참고 문헌·266
판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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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에 바친 삶- 복자 박상근 마티아가 만난 깔래 강 신부2019년 5월 26일 교회 인가2019년 5월 29일 초판 1쇄 펴냄지은이·모벡 공동체의 수녀옮긴이·이영길발행인·천주교안동교구발행처·천주교안동교구 (36678) 경상북도 안동시 마지락길 77 (안기동 35)전화·054-858-3111~3팩스·054-858-3116 이메일·sa3111@hanmail.net 홈페이지·www.acatholic.or.kr/coding/main.asp찍은곳·가톨릭출판사ISBN 값 13,000원ⓒ 천주교안동교구, 2019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CIP제어번호: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요약.본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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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지방에서의 소년 시절하느님의 안배가 있어 장차 마리아 신부가 될 아이가 시골의 소박한 수공업 가정에서 첫울음을 터트린다. 당시 프랑스 땅 머르트(Meurthe) 주의 크리옹(Crion)에서 1833년 8월 3일에 니꼴라 아돌프 깔래(Nicolas Adolphe Calais)가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도미니꼬 깔래 (Dominique Calais)이고 어머니는 안느 따르디어(Anne Tardieu)인데, 이들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힘든 농사일도 열심히 하는 진솔한 신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대장일(Marechal-Ferrant)*도 했다.아이는 출생 다음 날 세례를 받는다. 대부는 라비여(Raville)에서 농사일을 하는 니꼴라 깔래(Nicolas Calais)이고, 대모는 엥빌(Einville)의 안느 따르디어(Anne Tardieu)인데, 아이의 어머니와 성과 이름이 같으며, 베르트랑(Bertrand)의 부인이었다. 그 위로 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형 도미니꼬(Dominique)가 있고, 나중에 동생 샤를르(Charles)이 태어난다.소년은 화목한 가정에서 별 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다. 점점 커 나가면서 학교에서는 기초 과목을 배우고, 집에서는 아버지를 도와 쇠발굽을 박아야 하는 말들을 잡아 주기도 하며, 특별히 성당에서는 여러 축일과 행사들, 이를테면 성탄 때는 구유 꾸미기, 성지 주일이 되면 풍농을 비는 뜻이 담긴 성지 가지 준비하기, 성체 성혈 대축일 때에는 마을을 도는 성체 거동 행렬 등을 비롯하여, 로렌(Lorraine) 지방의 수호성인 성 니꼴라오 축일 행사 등, 이 모두는 열심한 소년 아돌프가 즐겨 참여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아돌프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심을 지녔다. 그리고 묵주 기도를 아주 정성을 다해 드렸는데,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하늘의 어머니는 몸소 아끼는 소년이 이렇게 사제성소의 길을 가도록 직접 준비하고 계셨다……. 현세의 어머니도 자기 아들을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훗날 아들 아돌프가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에 잘 보답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나중에 신학생이 되어서나, 박해받는 선교사로 지낼 때, 그리고 트라피스트회 수사로 있을 때도 어머니의 주보성인 안나 축일에는 잊지 않고 어머니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곤 했다.첫영성체를 할 때가 왔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어린이들이 일찍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1846년, 아돌프가 열세 살이 되어서야 자기 형과 함께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서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게 되었다. 이 첫영성체는 드랑똥(Deranton) 신부가 준비해 주었다. 이 사제는 평생을 이 작은 본당 크리옹의 주임으로 봉사했는데, 아돌프가 선교사가 된 뒤에도 언제나 ‘존경하올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었다.깔래 부부는 자기 가정의 맏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했다. 그래서 도미니꼬를 사제로 키워 보겠다는 희망으로 드랑똥 신부에게 맡겨 라틴어 공부를 하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아돌프는 자기 형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어 무척이나 실망한 나머지, 들에서 혼자 일을 하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응답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한 해가 지나고 도미니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공부하는 데는 소질이 없었거나 공부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돌프는 형 대신에 사제관에 가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장남의 실패로 상처를 입은 부모는 쉽사리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돌프는 두 해 동안 참고 견딘 뒤에야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이 허락을 받는다.“네가 열심히 공부할 마음이 있거든, 본당 신부님께 가 보아라.”그가 얼마나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토록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그는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라틴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 년 동안 스승의 가르침대로 온 힘을 다해 공부했으며, 본당 신부의 훌륭한 모범을 따라 사제직에 합당한 덕행을 나름대로 이미 닦고 있었다.1851년 학년 초가 되면서 아돌프의 실력은 상당히 향상되었다. 그래서 뽕따무쏭(Pont-a-Mousson) 소신학교의 중학 과정 이 년반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 인해 가족과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 되는데, 이 일이 젊은이에게는 상당한 아픔이 된다는 것을, 게다가 열여덟 살 나이의 젊은 청년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 학생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돌프는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또 한결같이 깊은 신심을 지닌 천사같은 모습,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는 자세 등은 그의 동료들과 스승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이처럼 사 년의 과정이 지나고 수사학 공부를 마치고 나서, 아돌프 깔래는 낭씨(Nancy)의 대신학교에 진학한다. 이때부터 그는 부모와 그리고 크리옹의 본당 신부와 서신을 주고받는데, 이 편지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신학교 생활을 했는지를 더 잘 살펴볼 수 있게 된다.그 당시에는 일 년 중 방학은 오로지 여름에만 있어 가족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새해가 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새해 인사를 하는지 보자.지극히 사랑하올 부모님께,본당 신부님이 마련해 주신 기회를 통해 축복받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메달 네 개를 부모님께 새해 선물로 보내 드립니다. 부모님이 늘 이 메달을 지니셨으면 합니다. 무수한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어 몽레알 주교님(Monseigneur de Montreal)의 말씀을 일일이 다 전해 드리지는 못합니다.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의 한결같은 말씀에 의하면, 이분은 진정한 성인이십니다. 우리도 그 점을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매일같이 삼십 분 동안 가르침을 주십니다. 저는 벌써 며칠 전부터 메달을 지니고 있고요. 제 바람대로 부모님도 지니시게 되면 우리가 성모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를 특별히 지켜 주실 겁니다……. 매일같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라고 외우시면 좋을 거예요. 아주 짧은 기도이지만 이로써 더없이 큰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가지고 계신 스카플라에 메달을 달으시면 좋겠어요. 만일 더 이상 가지고 계신 것이 없다면 제가 하나 만들어 드리기로 약속합니다. 이 신심이 얼마나 귀한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낭씨, 1856년 1월 5일벌써부터 아돌프가 지닌 사목 열성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신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앞으로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해에 자기 숙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모습이 잘 드러난다.사랑하는 숙모님,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성모님이 당신 자녀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이들이 성모님을 잘 알지 못하거나,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정성을 다해 사랑해 주시는지 그리고 하느님 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사랑하는 숙모님, 적어도 우리는 성모님을 알고 있으니,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성모님을 사랑합시다. 전적으로 믿음을 가지도록 해요. 그리고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을 실천하도록 해요. 그리하면 하늘나라에서 그분을 뵙는 행복을 틀림없이 누릴 것입니다.신학생이 된 아돌프는 낭씨 대신학교 1학년 때, 그곳에서 한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성직 지망생 선발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신학교를 방문했는데, 아돌프는 그분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먼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그 선교사가 알아보고서 아주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길이 아돌프의마음을 사로잡는다. 그에게는 이것이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들렸고, 이 일을 계기로 그도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성소를 확인한 그였지만, 그 뒤로 이 년 동안 자신의 원의를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기도하고 심사숙고하면서 이 부르심을 키워 갔다. 그러는 동안 신심과 선행을 닦고 학업에 온 정성을 기울이면서, 언제나 모든 면에서 동료 신학생들의 모범이 되었다.비록 그가 내적인 고민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그의 편지 속에는 그의 생각의 윤곽이 드러나 있다. 그의 동생 샤를르는 낭씨의 사범 학교에서 교육 공무원이 되기 위한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돌프는 동생 샤를르에게 편지를 보냈다.신학교에 또 다시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형제들에게 그것에 대해 알려 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알고는 받아들였단다. 이 모습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어. 작년에 우리 반이었던 신학생이 선교사로 떠나갔는데, 그 어머니가 “내 아들아,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가거라. 주님이 너를 내게 주셨으니, 주님께 이 큰 희생을 바치겠다.”라고 하셨단다. 이 새 선교사는 아직 복음을 전하러 외지로 출발하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이를 준비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외방전교회로 갈 예정이다. 이 전교회는 넉넉하고 훌륭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모두가 편안히 지낼 수 있다. 낭씨 출신의 여러 신학생이 이미 이 곳에서 생활했었고, 지금도두 명이 거기서 지내면서,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지. 물론 부모님들도 우리처럼 편지를 통해 아들들의 소식을 듣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자기 아들 선교사들이 임지로 완전히 떠나기 전에 드리는 첫 미사에 참석하여 아들들을 만나게 돼. 이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회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지만,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를 귀한 보물처럼 받아 준단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또 어둠 속에 버려진 영혼들을 구하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여기에 오기 때문이란다.1856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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